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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버나움...Capernaum, Capharnaüm (2018)

 

 

 

 

가버나움...Capernaum, Capharnaüm (2018)

 

 

사람을 칼로 찌른 죄로 수감된 소년 자인.

 

자인은 태어나면서 부모가 출생신고도 하지않았기에 발육상태를 보고 12살로 추정될 뿐입니다.

 

하지만 재판장에서 자인은 피고가 아닌 원고인으로 변호사를 대동한채 자리합니다.

 

피고는 다름아닌 자인의 부모.

 

자인은 판사에게 당당히 말해요. '자기를 낳은 부모를 고소하겠다'고요.

 

낳기만 하고 책임지지 않는 부모는 죄를 받아 마땅함을 호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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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의 전당 시네필로 프로그램의 이지훈 대표님 강의 내용을 일부 차용합니다. 차용된 내용은 색깔로 구분합니다.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받아 상영된후 호평을 받은 영화 '가버나움 (Capernaum, Capharnaüm)'입니다.

 

 

가버나움은 성경에 나오는 도시의 이름으로 예수가 기적을 행했던 곳입니다.

 

예수가 기적과 교훈을 전함에도 이곳의 사람들은 그 기적만 바라고 깨닫지 않아 결국 멸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영화에선 불어 'Capharnaüm'으로 표기되는데 '혼돈'이란 뜻도 내포합니다.

 

기적과 혼돈은 자인이 처한 베이루트속 처지를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의미에요.

 

재판장에서 부모를 고소한 자인의 호소 후 그간 자인에게 일어난일이 회상씬으로 이어집니다.

 

9명의 아이를 낳아 기르지만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부모.

 

그 아래에서 자인은 어른들 못지않게 가계를 몸바쳐 일조합니다.

 

오히려 동생들에게 애착을 갖는 자인에게서 통상적인 부모의 이미지가 오버랩돼요.

 

특히 유대감 짙은 여동생 사하르가 11살이 되어 생리가 시작되자 부모는 닭 몇마리를 받고 아사드에게 강제로 시집보내버리는데 이 사실을 안 자인의 필사적인 저항은 12살 소년이 그간 겪어온 삶을 낱낱이 보지 않아도 어떤 고난을 겪어 지금의 거친아이가 되었는지 추측할수 있게 만들어요.

 

 

사하르가 출가한뒤 부모를 마음에서 접은 자인은 집을 떠나버려요.

 

일자리를 구하러 놀이공원을 들렀다가 라힐을 만나면서 또다른 방향에 접어들어요.

 

 

불법체류자인 라힐은 위조 신분증으로 위태롭게 살지만 그녀의 삶을 지탱하는건 갓난쟁이 아들 요나스입니다.

 

자인은 그녀의 집에서 라힐이 일나간동안 요나스를 돌보는 일을 하며 함께 지냅니다.

 

 

그간 집에서 동생들을 돌봤던 장기를 발휘돼요.

 

각기 다른 처지에서 고난을 겪는 이들이지만 서로 묘하게 영향을 주고 받아요.

 

놀이기구의 여체 동상의 옷을 벗겨 가슴을 벌겋게 드러내는 자인의 행동은 여태 자신에게 애정은 커녕 방임했던 엄마, 즉 부모를 대중앞에서 능욕함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면서 동상주위를 맴도는 행동으로 여전히 애정을 고파하는 어린 소년의 상황을 반영합니다.

 

 

일터에서 아슬아슬하게 요나스를 몰래 데려와 키우는 라힐을 보며 자인은 여태 받지못한 모성을 눈앞에서 보게되는데 이게 자인에게 어떤 느낌이었을런지 가늠이 되지 않을만큼 아프고 뭉클하게 남아버려요.

 

애가 애를 보는 장면은 귀엽게 보일만도 한데 이 상황이 주는 배경을 생각하면 가슴한켠이 먹먹해짐을 느낍니다.

 

라힐이 단속반에 걸려 연락도 못하고 수감상태가 된후 자인은 요나스와 단둘이 남게 되는데 이 상황은 더 비극이 됩니다.

 

자인은 부모를 떠나며 스스로 다짐을 예측컨대 절대 부모처럼 무책임한 사람이 되지 않겠다는 각오가 비춰집니다.

 

그만큼 요나스를 돌보는 자인으로 하여금 보호자로서 최선을 다하려는 모습이 필사적으로 보일정도거든요. 라힐에게서 믿음을 얻은것 또한 동정이라기 보다 거친 베이루트속 생활에 길들여진 이들의 연민이 서로 교감된 것이라 여겨져요.

 

라힐의 행방을 모른채로 요나스를 어떻게든 돌보려 하지만 결국 12살인 자인에게 세상은 혼자 몸도 가누기 힘든 세상에 갓난아기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아기를 해외입양시키는 브로커인 아스파르에게 요나스를 넘겨야 하는 일이 자인이 택할 유일한 선택지임을 깨닫고 자기 손으로 요나스를 넘길때 자인의 마음이 무너지는것은 말로 표현하지 않고 울지도 않는 무표정한 얼굴에서 더 가슴아프게 느껴집니다.

 

 

부모와 같지않은, 그런 무책임한 인간이 되지 않겠다고 집을 나섰지만 결국 자신또한 요나스를 지켜주지 못한 사람이 되어버렸거든요.

 

그래서 집으로 돌아간후 자인이 폭발하게 되는것도 표면적으로 드러난 출생신고의 사실관계보다 자신의 분노와 치욕이 고스란히 반영된 부모와 마주하면서 이성의 끈을 놓은것이라 생각됩니다.

 

영화는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면 관객은 스크린을 벗어나 현실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달라요.

 

자인과 라힐, 요나스등의 배우들은 베이루트에서 캐스팅된 인물들로서 영화속 상황과 별다르지 않은 삶을 살던 사람들이거든요.

 

배우로 연기를 배운 사람들이 아닌, 그 가혹한 현실을 직접 겪었던 이들이기에 자인의 무표정한 얼굴이 더 무게감이 느껴집니다.

 

레바논의 현 상황의 비극을 아이의 시선으로 관조하는 장면들도 상당히 인상깊습니다.

 

교도소로 찾아오는 기독교인들, 이슬람교인들이 수감된 공간안에서 다함께 예배를 하는 장면에서도 자인은 한공간에 있지만 아무런 반응도 하지않은채 응시하기만해요.

 

종교적 문제 또한 시리아 내전에 영향을 끼친 원인중 하나인데 이 고통을 아무 관계없는 아이들마저 떠안아야 한다는 끔찍함을 차분히 전달합니다.

 

영화속에서 약탈, 절도, 폭행, 아동방임, 조혼등의 사회적 문제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려고 노력했다고 하는데 아동 성폭행만은 차마 생략했다고해요.

 

자인의 부모가 9명의 아이를 낳고 또 임신을 하는 무책임한 출산에 의문을 품게 되는데 이슬람에선 피임과 낙태가 율법에 어긋난다고 합니다. 최대한 많은 아이를 낳아서 종교를 널리 전파시키라는게 율법에 나와있다고 해요.

 

실제 자인의 부모는 14명의 아이를 낳았다고 합니다.

 

자인의 부모역은 연기전공한 배우들이고 아역들과 라힐등의 배우들은 거의 현지 캐스팅입니다. 사하르는 자인의 실제 친동생은 아닙니다.

 

라힐은 촬영후 실제 불법체류문제로 돌아가야 했고 요나스는 촬영때문에 스탭들이 며칠 더 데리고 돌봐야 했는데 이때 가장 큰 유대감을 가진 인물이 자인입니다. (실제 이름도 자인입니다.)

 

그래서 요나스와 함께 노는 장면에서 갓난아이가 자인에게 자연스런 반응을 하는것도 꾸며낸 액션이 아니에요.

 

감독인 나딘 라바키는 변호사 역으로 직접 출연합니다.

 

 

나딘 또한 베이루트 출신으로 유년기에 베이루트의 참상을 겪었기에 그녀가 가버나움에서 메세지를 전달하는데 상당한 진정성이 느껴져요.

 

영화의 음악감독인 칼레드 무자나르는 나딘 감독의 예전작품인 '카라멜'에서 함께 작업한 인연으로 부부가 되어 이번 영화에서도 좋은 음악을 선보입니다.

 

재미로 보기엔 제법 무겁고 아픈 영화지만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 작품입니다.

 

영화가 주는 사회적 파급력을 잘 알고 있으며 이를 긍정적으로 세상에 알리는 효율적인 매개체로서 충분히 존재이유가 됩니다.